강촌으로 MT를 갔을 때, 그 장대한 풍경을 바라보며 '귀여운 풍경'이라는 말이 가능한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다.
보통 귀엽다 라고 하면 작고 어린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귀여운 할머니'가 말이 되듯이, 귀엽다는 말은 단순히 작고 어린 것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아마도 시간이 흐르면서 귀엽다는 말의 의미가 확대된 것 같은데, 그럼 도대체 귀엽다는 말은 무슨 뜻이야? 사전을 찾아보자.
귀ː엽다[―따][귀여우니·귀여워][형용사][ㅂ 불규칙 활용] 보기에 귀염성이 있어 사랑스럽다. ¶하는 짓이 귀엽다.
귀ː염―성(―性)[―썽][명사] 귀염을 받을 만한 바탕이나 성질. ¶귀염성 있게 보이다.
귀ː염[명사] 사랑하여 귀엽게 여기는 마음. ¶귀염을 받다./아버지의 귀염을 독차지하다
- 네이버 국어사전
...뭐 어쩌라는 거야. 전혀 설명이 안 되잖아.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내던 나는, 군대에서 보급나온 2004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김훈 - 화장 을 보다가 마침내 귀엽다는 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애완성을 뜻하는 말이었다.
젊은 과장 둘은 그 두개의 리딩 이미지 중에서 어느 한편을 택할 경우에, 거기에 맞는 여자 모델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머리카락의 질감, 눈동자의 깊이, 눈두덩의 높이, 눈썹의 긴장감, 아랫입술의 늘어짐,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만나는 두 점의 극한감, 어깨의 각도가 주는 온순성과 애완성을 분석해 나갔다. - 김훈 '화장' 중에서
이렇게 따지면 '귀여운 풍경'이라는 말도 말이 된다. 아무리 장대한 풍경이라도 그 풍경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만큼 온순하고, 곁에 두고 즐길만 하다면 귀엽다는 말을 충분히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연예인을 보고 '귀엽다'고 느끼거나 어떤 상대를 보고 '귀엽다'고 느끼는 것은, 어느 정도는 같이 웃고 즐길만한 놀이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껏해야 연애상대, 남친 혹은 여친 수준이랄까.
여기서 귀엽다는 말이 요즘들어 많이 쓰이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귀여움이 깊은 사랑으로 나중에 발전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귀여움을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사랑 중에서도 낮은 단계의 피상적인 사랑스러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귀엽다는 말은 사랑보다 손쉽게 여기저기 갖다 붙일 수 있고, 어차피 애완용이라 나중에 버리더라도 크게 상처받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 로맨틱 코미디를 보면 여자 주인공들이 처음 남자 주인공을 만나서는 그 근육이 울퉁불퉁하고 도대체 귀염성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몸에 대고 "Why not? He's so cute." 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던 모양이다.
ps. He's so cute 에는 완곡한 성적인 의미도 있다고 하는데. 그러고보니 우리나라도 '귀여워'라는 영화를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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